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에 거주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제단을 쌓도록 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자신의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 성실과 의를 자기를 위해 인생의 탑을 쌓아 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쌓아온 것들은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가 축복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죽음 앞에 부질없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고 영적인 축복을 갈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사람과 싸워 쟁취하던 인생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과 본성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숙곳에서는 자기 집을 짓고 짐승의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살기 더 좋은 세겜에 와서는 땅을 구입하고 아예 눌러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락한 삶으로 인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잊고 살았을 때 딸 디나 사건으로 수습할 수 없는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디나 사건은 그의 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이방 사람들과 섞여 살지 않도록 그의 보금자리를 흩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나타나셔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야곱은 벧엘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현실의 삶이 만족스러워 벧엘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자꾸 미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미루고 미루어 그가 삼촌 집을 떠난 지 십여 년이 흘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야곱에게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원어로 ‘쿰’으로 절망적인 현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야곱에게 있어서 디나 사건은 혼자서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그는 홀로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아들들의 죄로 인해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쿰”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이는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막 5:41). 예수님의 음성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야곱에게 “일어나라” 하심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회개의 심령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머뭇거림,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대해 미련을 두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몰과 세겜이 서로 통혼하자 할 때에도 머뭇거렸습니다. 그 마음속에 그들과 섞여 살면서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이미 야곱의 집에 이방 문화가 침투해 있었습니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었지만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은밀히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마음에 들어온 이방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라헬은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몰래 가정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훔쳐왔습니다. 여기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밖에 다른 신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우상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이 더 위험합니다. 특히 하나님보다 돈을 더 숭배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2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 God도 대문자인데 돈도 대문자 Money입니다. 성경은 돈을 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섬기고 돈도 같이 섬길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돈은 풍요의 신 바알로 상징되며 쾌락은 바알 신의 아내 아세라로 상징됩니다. 돈과 쾌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같이 따라옵니다. 이것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말씀에 배치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신, 특히 풍요와 쾌락으로 상징되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이방신을 버렸습니다. 야곱이 두 번째로 행했던 것은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속임수를 써 가면서까지 잔인하게 복수했던 아들들로 인해 이방인 가운데 악취를 풍긴 죄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아들들도 악영향을 받아 그렇게 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결하게 함으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엡 4:22).
우리는 어떻게 정결하게 될까요?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2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피로써 정결하게 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히 9:14). 야곱이 행한 세 번째 결단은 ‘의복을 바꾸어 입는 것’이었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그동안 입어왔던 옷을 바꾸어 입으면서 새 삶을 살고자 결단합니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롬 13:14).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주신 빛나는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사 61:10). 그러므로 주님의 옷을 입은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야곱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는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그가 가는 길에서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이 처음 그에게 나타나신 그곳에 가서 제단을 쌓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이 회개하자 야곱의 가족들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방신상과 귀고리를 내놓았습니다. 귀고리에는 신상이나 주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귀고리는 몸에 지닌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그들은 새 출발을 위해 자신의 죄와 함께 신상들을 묻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롬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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