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시기 전의 상태 혼돈과 공허와 흑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혼돈은 formless로 어떤 형태나 질서가 없는 상태를 말하며 ‘공허’는 텅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흑암’은 빛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절에서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문학적 표현하고 있습니다. ‘깊음’은 ‘바닥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흑암은 바닥이 없는 심해의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운행한다(hover)’는 말은 위에 붕 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뭔가를 불어넣고자 하는 준비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질서도 없고 생명도 없고 빛도 없는 땅에 직접 빛과 생명과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창조사역을 수행하고자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창조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요한복음 1:3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르시되’라는 말이 1장에 11번이 반복되어 나오고 ‘그대로 되니라’는 6번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세상에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서 빛은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고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빛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은 생명과 구원을 줍니다.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 가운데 다 드러나고 분명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무지와 어둠의 노예된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빛으로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그가 다음과 같이 간증하였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태초에 빛이 비치라’ 하신 그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십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꽁무니를 빼고 순식간에 달아납니다. 하나님은 빛의 하나님으로 능히 우리를 어둠에서 건지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명령하셨을까? 이 말씀은 명령의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의 소원이 말씀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좋았더라’는 말은 1장에서 7번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좋았더라’하며 감탄을 자아내셨습니다. 세상은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악하고 추한 세상이고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세상이 악하고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이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 창조된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딤전 4:4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자연 세계를 보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반합니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과 예술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 세상을 볼 때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세상은 아름답고 사람이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추하고 슬프고 운명적이고 살기 지겨운 세상이 됩니다.
둘째로,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소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피조물의 존재 목적입니다. 피조물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시편 19:1절은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산의 바위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새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고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새가 운다’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의 가사는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노래라고 합니다. 동학농민군의 아내들이 전사한 남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없을 때 새의 노래 소리가 우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새가 우는 것’이 아니라 ‘새가 노래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예술품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이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이를 통해 찬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우리 마음에 쉼과 치료를 주십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하지만 창조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아름답고 질서 있고 선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을 보면 절로 노래와 시가 나옵니다. 자연을 통해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자연계시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됨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부르셨다’는 말은 1장에서 총 5회가 나옵니다. ‘부르셨다’는 것은 ‘정의하셨다’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일반적인 24시간 하루를 의미할까요? 혹시 수억 년이나 수십억 년이 하루가 아닐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부르셨다’는 말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면서 낮과 밤을 구분하셨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일반적인 저녁과 아침, 24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첫째날은 ‘첫 날(the first day)’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하루(one day)’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즉 24시간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넷 째날 창조하신 ‘낮’과 ‘밤’, ‘사계절’, ‘날(하루)’, ‘해(년)’은 무엇일까요? 태양과 별들이 만들어진 넷째 날 앞에도 다른 날들처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동일한 수식 어구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 태양이 만들어진 제 4일 이후나 그 이전의 하루가 모두 동일한 하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개념을 애매모호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셔서 24시간을 하루로 ‘정의’하셨습니다.
* 이 글은 UBF에서 성경공부한 것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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