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1:1-25)
창세기는 성경의 첫 권입니다. 창세기는 ‘세상의 창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만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창세기는 근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와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근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뿌리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토론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증명하려하지 않습니다. 이는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처럼 명료하게 시작에 관해 다루는 책이나 사상은 없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 사명과 행복,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의 타락, 죄와 불행의 시작, 민족의 형성, 구원 역사의 시작과 과정 등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과 사상과 종교가 답하지 못했던 인생의 근본문제와 해결책을 알려 줍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법칙에 세상을 맡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이 친히 지으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끌어 오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역사적인 측면에서 긴 호흡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이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선포(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는 시간의 출발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의 시작도 태초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태초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태초에 시간이 시작되었기에 태초 이전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천지’는 지구를 포함한 우주를 말합니다. ‘창조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인데 이는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로 무에서 유의 창조를 말합니다. 이와 비교되는 말로 ‘아사’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신론적 접근에 기초한 창조론과 무신론적 접근에 기초한 진화론이 있습니다. 성경은 진화가 아닌 창조를 말합니다. 모든 것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선포합니다. ‘창조’라는 말에는 만드신 이의 청사진, 계획, 의도, 목표가 있습니다. 창조의 세계는 고도의 정밀성과 의도성이 있습니다. 창조는 진화론에서 말하는 확률게임이 아닙니다. 1절은 세상은 우연히 수십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과 함께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진화론적 논리에 의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비행기 부품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조립되어 우연히 비행기가 만들어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설계자의 설계와 지혜와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비행기보다 더 복잡한 생명 세계와 자연 세계와 우주 세계가 우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존재하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인쉬타인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모르고 살아가고 있거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양된 사람들이 갖는 최대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자기 부모가 누군지 모르다는 것입니다. 양부모가 아무리 잘해 주어도 그들은 자기의 뿌리를 찾고자 합니다. 먼 나라로 입양된 아이가 성장하여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여 만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들이 친부모를 찾으면서 내면 깊숙히 묻혀 있던 심리적인 문제, 근원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들은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방황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른 채 살아가는 고아와 같습니다. 그들은 찾을 때까지 방황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낳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찾게 되고 방황은 그치게 됩니다.
세상의 기원의 문제에 대한 이론인 창조론과 진화론은 둘 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존재할 때부터 그것을 보고 관찰한 누군가가 있어야 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세상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어느 것이 타당할까 생각하고 선택하여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학 교과서를 통해 진화론을 익히 배웠기 때문에 진화론을 의심하지 않고 과학적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진화론의 과학적 헛점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진화의 흔적은 진화론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그저 진화라는 법칙에 의해 사람이 분류해 놓은 생물의 진화 계통도대로 아메바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믿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설계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주인도 없고 관심을 갖는 조물주도 없고 우연히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유물론적 인간에 불과합니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물학적 화학반응에 의해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고 인생의 존재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철학이 생겨나고 종교도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참 인생은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슬프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나를 낳아 준 부모를 모르는 고아와 같이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느니 현재를 살며 의미를 부여하자고 합니다. 의미는 붙이기 나름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실존주의적 접근은 실리적이고 매력적인 사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묻어두는 것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겉은 울창한 숲과 공원이지만 그 밑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쓰레기 매립장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과 의도 가운데 세상을 만드셨다고 선포합니다. 창조론에서는 우연이나 운명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해석하고 현실을 극복해 나갑니다. 1절의 창조의 선포를 받아들일 때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존재의미와 목적이 생기게 되고 우리 인생이 가야 할 목적지와 방향이 생기게 됩니다. 특히 청년의 때에 창조를 만나면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비전을 영접하고 의미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12:1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나에게 꿈과 비전, 희망과 열정을 주십니다.
* 이 글은 UBF에서 성경공부한 것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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