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소식은 사가랴의 오랜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소식으로 그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는 사가랴 가문에 큰 경사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태어날 아기가 자라 장차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일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한 메시지로 인해 마음을 준비하고 메시아를 영접함으로 천국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메시아 왕국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그 어떤 기쁨보다 강렬하고 진하며 감동적입니다. 이 기쁨은 한 사람의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기쁨이라기보다 근본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르며 하늘로부터 오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요 14:27-28). 이 기쁨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의 기쁨이고,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재회하는 감격의 기쁨입니다(눅 15장). 이 기쁨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 기쁨의 샘을 발견하는 기쁨이며 메마른 땅에 이른 비가 내려 생명이 싹트는 기쁨입니다(시 84:6).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는 이유는 그가 전할 메시지에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뒤에 오시는 이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을 준비하여 메시아를 영접함으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4절에서는 기쁨의 본질에 대해서 다루었고, 15-17절에서는 세례 요한의 탄생이 큰 기쁨이 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제시하는 기쁨의 이유는 세례 요한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때문입니다. “큰 자가 되며”라는 것은 he will be great로 ‘위대한 자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 앞에” 큰 자가 됩니다. 여기서 위대함의 기준은 세상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것을 말합니다. 세상적 기준은 일시적이고 오류와 결함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참되고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을 겸손하게 섬기는 자입니다(마 20:26-28; 막 10:43-45).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작은 것 하나라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9). 세상적으로 위대한 자는 하나님 앞에 작은 자입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자는 이미 상을 받은 자입니다(마 6:2). 위대한 자는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자입니다. 그는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는 자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요한의 삶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자기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자기 사명을 이사야 40:3-4에서 찾았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그는 자신을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지 않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했습니다(요 1:23). 그는 사람들로부터 메시아로 추앙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메시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작은 자임을 강조했습니다(요 1:27). 그는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자임을 알고 그를 증언하는 일에 온 인생을 바쳤습니다(요 1:8). 그는 예수님이 등장하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헤롯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며 그가 위대한 선지자임을 인정해 주셨습니다(7:2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인생을 위대하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대하게 되는 것은 내가 원래 위대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천사는 먼저 세례 요한의 ‘위대함’에 대해 언급했고 이제는 그의 순결하고 구별된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않는 삶은 나실인의 삶을 말합니다. 민수기 6:2-21을 보면 나실인에 관한 규례가 있습니다. 나실인은 ‘바친다’, ‘헌신한다’는 뜻을 가진 ‘나자르’(nazar)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특별한 서원을 하고자 할 때 헌신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으며 죽은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일생 동안 나실인으로 서원했던 사람은 삼손(삿 13:5), 사무엘(삼상 1:11),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집과 그 후손들(렘 35:6)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실인으로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위해 일생을 드렸습니다. 바울도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드린 것은 주님의 특별한 사명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그 부모가 성령이 충만하였으므로 이런 영향이 아들에게 미친 것입니다. 누가는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대해 17회나 반복했습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에게 조언을 해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41-42).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시를 노래하였습니다(67).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였던 시므온의 삶에 관해서도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기술하였고, 그가 아기로 오신 메시아를 보기 전에 “성령이 그 위에” 계셨고(2:25),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26), “성령의 감동으로”(27) 성전에 들어갔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시험을 받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4:1).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유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구분하고 구약은 성부 하나님이 시대, 예수님의 성육신 기간에는 성자 하나님의 시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는 성령의 시대로 구분을 합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성령의 역사의 구분을 두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 활발하게 일하셨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성장한 후 지혜와 지식이 성장해야 예수님을 잘 알고 성령이 충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은 아이가 성인이 된 후의 본격적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하지만 본문은 성령은 모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충만하게 하셔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어릴 적부터 자녀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면서 신앙 교육을 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영이 거합니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포도주와 독한 술을 먹지 않는 것과 성령 충만한 삶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영적인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육과 영 사이에서 결정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굴복할 것인지, 적그리스도의 영이 판치는 세상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말씀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에게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요일 4:3; 골 3:16). 성경은 술 취함과 방탕을 연결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 술을 마셨고 예수님도 술을 드셨다는 것에서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술의 위험성에 대해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 술은 자제력을 상실하게 하며 육신의 쾌락에 빠지게 하는 유혹의 매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습관적으로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회식 자리의 술 문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두 잔이 커져서 여러 병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불신자와 어울려서 술 취해서 하는 말을 녹음해 본다면 자신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녹음을 들을 때 “내가 이렇게 육신적이었는가?”라는 절망의 탄성을 자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술 취하는 쾌락적인 문화를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 이 글은 NAC(New American Commentary)를 비롯해서 studylight, preceptaustin, Biblegateway, Bible Hub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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