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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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20장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세기 17:2-6)

Barnabas Suh 2023. 5. 2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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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사람들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다시 세우십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노아 때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무지개를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에 아브람과 세 번의 언약이 있었거든요(12:2,13:16,15:5). 그런데 ‘언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15:18에서 등장하기 시작해요. 15장의 언약의 내용은 자식에 대한 언약과 땅에 대한 언약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언약만 말씀하시고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짐승을 쪼개는 고대의 언약의식을 치렀습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언약을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세우시고 그냥 끝난 게 아니라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번에는 할례로 표징을 삼으십니다(17:10). 17장에서 눈에 확 띄는 것은 언약이라는 단어가 13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언약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어원에서는 ‘차꼬에 채워 속박하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언약에 얽매이시는 분이십니다.

 

15장의 언약과 17장의 언약을 비교해 봅시다. 15장에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식에 관한 좁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17장에서는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하심으로 자신의 후사에 대해서만 아니라 여러 민족을 들먹입니다. 하나님은 자식에서 여러 민족으로 확대하여 말씀을 하세요. 아브람의 스케일을 키워 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은 비전이 줄어드는데 하나님의 비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약을 점점 확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럼 언약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2절에서 하나님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말씀하셔습니다. 6절에서도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생육하고 번성케 되는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숫자만 번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번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크게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천하 만민을 향한 번성의 주인공, 복의 근원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보면 ‘내가’라는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아요?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는 것은 아브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아브람의 상태와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하나 낳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번성하는 기적을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100세 된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 민족을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주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으로 생명 구원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예표입니다.

 

아브람은 이 말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약속을 상기하니까 겁이 덜컹 났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잊었구나, 약속을 잊고 있었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안주하여 하나님을 멀리 했던 죄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영접하고 경외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실 때 순종했더니 물고기를 왕창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고 그 앞에 엎드려 간구했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10). 우리도 하나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을 느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아브람은 ‘이스마엘의 아버지’ 일뿐이었습니다. 아브람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스케일면에서 너무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 실감이 가도록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이란 의미는 ‘한 가정의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의미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Abram에서 Abraham이 되는 건데요, ‘h’가 ‘복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고 이번에는 좀 더 발전적으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이라고 불리면서 아, 나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구나, 이렇게 자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뜻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자기만족적인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로부터 관심을 넓혀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고 살리는 여러 나라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 앞에 닥친 문제만 갖고 기도하기에 급급합니다. 조금 폭넓은 사람이라면 자기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제목이 더 확대해서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회자와 성도를 위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믿는 신자의 정체성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왕이면 품이 얼마나 넓어야 하겠습니까? 제사장의 임무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왕’의 개념에 덧붙여서 ‘제사장’ 개념까지 갖다 붙여 신자가 얼마나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쓰면서 위로한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얼마나 자신에 대해 비참하고 슬프게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신자의 정체성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벧전 2:9). 성경은 참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내가 거기 갔다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 어떻습니까? ‘세계’, ‘온 천하’, ‘땅 끝’, 예수님 시대의 세계의 심장부 ‘로마’ 등, 이런 단어들만 보아도 마음이 탁 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부담스러우리 만큼 원대하고 드넓고 깊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꾼다고 합니다. 야망을 갖고 큰 일을 하고자 하면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코피 흘리며 엄청 노력합니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대부분의 경우 돌아오는 결과가 신통하지 않아 ‘헬조선’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그러면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을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랍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고 부자인 아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빽’이 없어 계급상승의 사다리를 타지 못한다고 하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는 가장 큰 ‘빽’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소유 삼으셨고 나는 그의 백성이고 나를 ‘여러 나라의 아버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창조주 하나님이 내 편이신데, 꿀릴 게 없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을 영접할 때 답답했던 마음이 탁 트입니다. 젊은이들이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매이는 이유가 부정적이고 힘든 현실에서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힘든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요? 아브람과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나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원대한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를 역사의 주인공이요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의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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