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요셉은 죄를 미워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를 먹이기 위해 헤브론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은 목초지로 양 키우기에 좋은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어 형들이 잘 있는지, 또 양 떼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기서 형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가 들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무엇을 찾는지 물었습니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그가 들에서 방황하였다는 것에서 그가 형을 찾고자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시킨 심부름을 끝까지 감당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한 번 가 보고 없다고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니느라 방황하였습니다. 요셉은 그에게 형들을 찾으니 형들이 어디로 갔는지 가르쳐 달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형들이 세겜에서 30킬로 떨어진 도단으로 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포기하고 집으로 가지 않고 형들이 있는 도단까지 갔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달리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형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그는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줄 알면서도 찾아다녔습니다. 요셉의 이런 충성스러움은 그가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에도, 그가 감옥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도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충성하였습니다. 그는 야곱의 노년에 얻은 아들로 온갖 귀염을 받고 자라 버릇 없이 자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충성스러움이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이는 노년에 변화된 야곱의 신앙적 영향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갖게 합니다. 그의 충성스러운 자세는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빛을 발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스러움이란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것이고 어떤 일을 끝까지 완수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능력이 많은 자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자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가진 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긴 그들을 칭찬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 주님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세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를 기초로 더 큰 일에 쓰십니다.
사실 충성스러운 사람은 고생을 합니다. 사람들은 쓸 데 없는 일을 한다고 해서 사서 고생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효율적이고 이익이 될 만한 것만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립니다. 물론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적은 일부터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입니다.
충성스러움은 믿음의 가치관에서 나옵니다. 슬픈 생각을 하면 충성하기 쉽지 않습니다. 요셉이 종살이 할 때나 옥살이 할 때에도 억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충성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될 때나 환경이 어려울 때에도 변함 없이 충실한 것이 충성입니다.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하며 상당히 비아냥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기에 쉽게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혼자라는 것을 보고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말하자고 모의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요셉의 꿈 때문에 그들은 상당히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요셉으로 인해 집안에서 그들의 위치가 위축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사라져 주어야 공평하게 자기 지분을 물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은 누구라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꿈을 깨뜨리려고 하다가 꿈이 이루어집니다. 신화들을 보면 운명을 피하려다 운명에 걸려드는 것과 같습니다.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그런 가운데에서도 르우벤은 요셉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의 생명을 해하여 피를 흘리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냥 구덩이에 던져 놓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의 속생각으로는 자신이 그를 구원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자 하였습니다. 르우벤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장본인이었지만, 여기서는 장자로서의 책임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죄를 범한 후에 죄의식을 느끼고 마음을 겸손히 했던 것 같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물이 없는 빈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채색 옷은 야곱의 편애를 상징합니다. 형들은 야곱의 편애가 몹시 싫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호소할 때도 형들은 그를 무시하고 옆에 앉아 음식을 먹었습니다(42:21). 만일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해도 애써 무시해가며 태연한 척 하였을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대로 요셉의 자기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염려를 놓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길르앗에서 오는데 낙타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요셉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렬이었습니다.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이 때 유다가 자기 형제들에게 제안했습니다. 동생을 죽여 피를 덮어 쓰지 말고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노예로 팔자고 했습니다. 유다는 꽤 합리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고 또한 자기들을 시기하게 하는 요셉의 존재도 없애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요셉이 같은 혈육으로 동생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진정 동생을 염려하는 마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동생을 죽이는 것을 결정적으로 막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유다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 따랐습니다. 요셉은 결과적으로 유다를 통해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간섭합니다. 그들은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꿈쟁이 요셉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한 구석에는 죄의식이 자리잡아 숨어 있다가 나중에 그들이 총리가 된 요셉에게 추궁당할 때 그들은 죄의식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고 두려워했습니다(42:21-22). 이처럼 사람은 죄를 지으면 죄의식으로 고통받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겉으로는 음식을 먹으며 왁자지껄 기분 좋다고 떠들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양심이 마비되어 죄를 지어 당장은 못느끼지만 자신의 추한 꼴이 드러났을 때 그들은 괴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는 나병과 같습니다. 나병환자는 살이 썩어들어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도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흉한 몰골을 거울로 보고 알 때 자기를 혐오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돌을 던질 때 버림받은 고통으로 자신의 삶을 저주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33). 죄에는 그에 따르는 벌이 있습니다. 이런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대속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이를 영접한 자는 죄 사함을 얻고 죄로 인한 상처가 나음을 입게 됩니다.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때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갔습니다. 미디안 사람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처 그두라 사이에서 난 네째 아들 미디안의 후손들입니다(25:1, 2). 25절에서는 이스마엘 사람들이라고 하였고 28절에서는 미디안 상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이 동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차의 안전을 위해 동행하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서로 교류하며 협력하는 관계였을 것입니다. 37장에서 형제라는 말이 21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형제들 간에 벌어진 이야기를 주된 소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를 미워하여’, ‘더욱 미워’, ‘시기하되’라는 단어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4,5,8,11). 이를 볼 때 형들의 시기심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극의 발단은 형들의 미움과 시기입니다. 시기심과 미움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지 못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1:31을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고 귀중한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평가합니다. 비교 평가하여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하거나 뛰어나면 교만에 빠지고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이나 뛰어나면 패배의식과 시기심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평가 받는 상대적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나를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본분을 알고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충실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 두신 각자의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이를 발견하는 것이 참된 자아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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