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그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소돔을 향하여 갔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습니다. 1절을 보면 두 천사가 소돔으로 간 것이고 나머지 한 사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 선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간곡히 소돔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는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는 예를 들어 아룁니다. 의인 50명이 있는데 과연 주께서 그 의인 50명과 함께 멸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시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약점을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약하십니다. 믿음을 사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대해 약하십니다. 요나서에 보면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자 심판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욘 3:9). 왕조시대에 극악무도한 아합 왕이 엘리야로부터 심판의 메시지를 듣자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약해지셔서 재앙을 그의 시대에는 내리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왕상 21:27-29).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고,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렘 29:1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기초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인 50명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45명으로 깍았고, 계속해서 40명, 30명, 20명, 맨 나중에는 10명까지 깎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뭔가 흥정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무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중보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상의도 하지 않고 심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아브라함에게 천기를 누설하는 것처럼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역사를 이루어가실 때 반드시 사람을 택하여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시고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면서 때마다 사람을 택하시고 키우시고 훈련하셔서 같이 일하십니다. 출애굽 역사에 모세를 쓰셨고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세우실 때 다윗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12제자를 키우셨습니다. 사람을 쓰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원칙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하면서 의인의 숫자를 깎으면서 흥정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에 부합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구원역사에서 하나님의 친구로까지 격상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모든 비밀을 함께 공유합니다(요 15:14,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시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시고 구원역사에 우리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티끌과 같은 우리를 친구요 동역자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으로부터 겸손의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가 인원을 깍을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32)라고 겸손하게 아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요 동역자라고 해서 아브라함은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언제 어디서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당연시 여기고 하나님께 청구서 내밀듯 요구하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자세가 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즉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는 자판기가 아니십니다. 우리는 자격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중보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역사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거창한 게 아니라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가 되고 목사님이 되고 전도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동역자로서 해야 할 일은 중보기도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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