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정보를 여러 성경주석을 종합하여 알기 쉽게 풀이하였습니다.

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자세히보기

창세기/1-10장

생기를 불어 넣으신 하나님(창세기 2:4-7)

Barnabas Suh 2023. 5. 12. 07:11
반응형

생명의 생기로 생령이 된 인간

들어가며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환경을 갖게 되면 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의 결핍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갖고자 노력합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더 좋은 환경을 갖고자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자기 취미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은퇴를 하면 죽음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어지고 우울해지고 허무로 인해 살아갈 의욕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그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지으신 사람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계명의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고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의 영적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여자를 지으시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마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주셨던 에덴의 기쁨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2:4-7)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1장의 하나님은 엘로힘의 하나님이고 2장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1장은 천지창조를 중심으로 기록하였고, 2장은 인간창조 중심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엘로힘은 ‘권능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여호와’는 인격적이고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14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자존자’, ‘원인자’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에 6823번이나 나옵니다. 2장의 내용을 보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 대화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아담을 위해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고 아담을 위해 여자를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사람과 관계성을 맺으시고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장은 창조의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만물 창조를 초점으로 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런 나 2장은 사람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 것이 아닙니다. 

 

5-6절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땅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고 초목이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땅을 갈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초목, 채소’는 사람의 경작을 통해 성장하는 식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직 사람이 가꾸어야 하는 초목이 없는 원시상태였습니다. 이 구절은 사람이 살게 될 에덴동산 주변의 환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은 밭을 경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추측한 것이지만,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개와 같은 수분이 지구에 전역에 걸쳐 수분을 공급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노아 당시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홍수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의인화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는 장면은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사람을 토기에 비유를 하였습니다(롬 9:20-24;사 9:16; 45:9; 64:8; 렘 18:1-6).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예술가의 혼을 담아 만드셨습니다. 이 모습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과 보살핌을 보여줍니다. “흙”은 ‘먼지(dust)’를 의미합니다. “땅의 흙”이라고 표현한 것은 땅의 돌도 있고 고운 진흙도 있듯이 땅의 고운 진흙으로 사람을 토기를 빚듯이 지으셨음을 말해줍니다. 흙은 사람과 짐승의 물리적 특성의 근원이 되는 원료입니다. 

 

인간이 ‘먼지’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은 육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른 땅의 짐승들과 비교할 때 날렵함이나 힘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연약합니다. 사자와 호랑이처럼 날쌔지 못하며 독수리처럼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도 못합니다. 하마와 꼬뿔소처럼 강한 뿔이 있어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코끼리처럼 덩치가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십니다(시 103:13-14). 만일 인간의 연약함이 없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강함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하였였는데, 그는 “약한 그 때에 강함”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하나님과의 사랑은 더 커지고 그의 능력이 나의 연약한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지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은 “땅”과 관련된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 땅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경작하도록 한 땅의 일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몸을 비하하는 자유주의적 견해나 금욕적 견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쾌락에 맡겨 하나님이 주신 땅의 일을 등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욕주의에 빠져 자기 몸을 지나치게 제어하고 학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직업 소명설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직업을 소중히 여기고 근면하게 일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 공동체를 섬기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 몸도 관리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몸을 돌보며 건강하게 유지해야 힘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동물도 땅의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동일한 흙이라는 물리적인 속성을 공유하고 이 땅의 환경에 맞게 어울리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종 동물들을 지으실 때와 다른 묘사입니다(19).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점차적으로” 지으셨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의 과정을 묘사하듯 사람을 지으신 과정을 묘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신 동작은 의인화한 묘사입니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숨을 불어넣는 동작은 키스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감과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는 동물과의 차별성을 줍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입니다.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이 종교의식을 행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종교의식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지만 인간은 신적 존재를 찾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도 위기가 닥칠 때나 절망적 상황에 처할 때 신을 찾고 기도합니다. 인간은 인정하기 싫다고 하지만 종교적 속성을 갖고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인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숨결을 받아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와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를 배제한 채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혼란만 가중시키고 허무함을 더할 뿐입니다. 

 

생기는 히브리 원어로 ‘니쉬마트’로 호흡(숨)이라는 뜻입니다. 이 호흡은 ‘생명의 호흡(숨)’으로 하나님이 생명의 수여자가 되심을 말해줍니다. 과학자들은 생명의 현상을 연구하지만 생명의 근원에 관하여는 신비의 영역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생명의 기원을 단백질에서 찾지만 실험실에서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연발생설과 반대되는 개념이 생물속생설만이 유효합니다. 자연발생설은 가설일 뿐이지 실험으로 증명된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생명의 하나님의 호흡(생기)으로 말미암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생명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때 인생 목적에 빗나간 삶이 됩니다. 사람이 허무를 느끼는 것은 바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이고 생명의 근원을 찾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4은 성자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선포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가 가진 죽을 생명과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한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꽃병의 꽃과 같이 현재는 활짝 핀 상태이지만 곧 시들고 마르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고 아름답게 되며 가치를 갖게 됩니다. 생명의 근원을 알 때 우리는 그 생명을 창조주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며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졌을 때 비로소 사람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은 living soul로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뜻이 됩니다. 히브리 원어에서 말하는 ‘영혼’은 히브리 원어로 ‘네페쉬’로 ‘생물, 생명, 목구멍, 영혼’ 등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네페쉬’는 사람의 살이나 시체에도 적용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레 19:18; 레 21:11). 인간은 영과 육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일원체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요소는 하나님이 형상(속성)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일은 신성한 것이고 육의 일은 더럽고 천한 일이라는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원론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땅의 흙에서 취함을 얻었기 때문에 땅의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땅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은 분리됩니다. 육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부활의 때에는 영과 육은 다시 합쳐져 신령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을 새로운 부활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UBF에서 성경공부한 것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