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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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0장

노아의 실수(창세기 9:18-23)

Barnabas Suh 2023. 5. 2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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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벌거벗은 모습

들어가며(9:18-11:26)

 

8강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분화의 과정을 거쳐 여러 민족을 형성하였는지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는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어떻게 번성해 갔는지를 다루었고,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되면서 수많은 민족과 언어가 생겨나게 되었음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통해 죄악된 인간을 쓸어버리셨지만, 여전히 세상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함의 후손들 중에서 흩어짐을 면하고자 큰 성읍을 짓고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고 그들의 이름을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지만, 죄악된 인간은 서로 모여 높은 탑을 쌓아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상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11장에서 셈의 족보로 결론을 내면서 그 가운데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12장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복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심을 주목합니다. 

 

노아의 부끄러운 모습을 덮어준 셈과 야벳(9:18-23)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습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 왜 이 말을 추가했을까요? 이것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싸움의 대상 가나안 사람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가나안이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바벨탑을 세운 족속은 함 족속입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 사실을 알게 할 목적으로 추가적인 언급을 한 것입니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퍼지다’는 말은 꽃씨가 터져 사면에 흩어지듯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나무는 당시 기후에 가장 알맞은 나무입니다. 노아가 있던 곳은 아라랏 산이 있는 지역으로 지금도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의 ‘포도주’는 정관사 ‘하’(the)가 붙어 있어 노아가 그 같은 포도주에 이미 익숙해 있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되었습니다. 사실 그가 포도주를 마신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연수를 구하기 어려웠던 히브리인들은 일상생활에서 포도주를 음료수로 사용하였으며 하나님께 전제를 드릴 때에도 제물로 삼았었기 때문입니다(출 29:40; 레 23:13). 그러기에 성경도 이를 과다 섭취할 때에 따르는 폐단에 대하여서만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잠 23:20, 21; 사 20:1; 28:7; 엡 5:18). 그가 왜 포도주에 취해 알몸으로 누워있었을까요? 포도주를 마시고 열이 나서 벗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영적 긴장이 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허물이 있었습니다. 

 

이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가 알몸으로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함은 자기가 덮어 줄 수 있었습니다. 자식이 아비의 허물을 가려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가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함은 이 부끄러움을 공개한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전과 이후에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말해 준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의 통로였고,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함은 노아의 허물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하고 이를 형제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노아의 영적 권위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셈과 야벳의 자세는 함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서 아비의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고 해서 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에게 하나님처럼 완벽한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허물을 감당해 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면서 저주하였습니다. 이 저주는 역사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가장 비천한 종의 형태로 전락되었고(수 9:23), 그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정복당했습니다(왕상 9:20, 21). 그 후에도 칼타고인이나 애굽인들과 같은 가나안 족속들은 페르샤인, 마게도냐인,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 의해 계속 철저히 정복당하였습니다(Keil). 여기서 노아는 왜 함을 저주하지 않고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저자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 이름을 쓴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마치 아비의 허물을 떠벌인 함의 모습과 겹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민족들의 죄악이 꽉 찰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때가 되자 이스라엘을 통해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대적인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라 하실 때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기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백성입니다.

 

한편 노아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야벳을 창대하게 하셔서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벳을 축복하면서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의 문자적 뜻은 '야벳에게 넓은 공간을 주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야벳 족속의 영토와 인구뿐 아니라 문명, 문화에도 관계된 것인데 참으로 유럽의 문화와 과학, 희랍의 철학, 로마의 법정신 등은 야벳의 후손들에 의해 이룩되었습니다. 야벳은 노아의 막내아들로 셈에게 주신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950세가 되어 죽었습니다. 

 

18-29절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은 다 허물과 실수를 하게 되어 있고,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느냐? 드러내느냐?가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됩니다. 노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덮어주신 하나님입니다. 6장에서 노아를 소개할 때 그를 ‘의인’, ‘완전한 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후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할 뿐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덮어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셔서 그들을 가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죄를 덮어 주시고 그들을 죽음의 사자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성막의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는데 그 위를 덮는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는 ‘덮어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다 들춰내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시고도 안 보신 척하십니다.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그냥 넘어가십니다. 시편 32:1,2은 말합니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죄를 가리시는 주님의 은혜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우리도 형제자매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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