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정보를 여러 성경주석을 종합하여 알기 쉽게 풀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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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20장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창세기 11:27-12:1)

Barnabas Suh 2023. 5. 2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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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를 위해 해외로 출국하다

들어가며(11:27-12:20)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자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의 낙원을 남겨 두시고 지키게 하심으로 낙원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은 가인의 반항으로 이어지고 그의 후손은 하나님 없는 세속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셋의 후손을 통해 구속역사의 물줄기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시대에 들어서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결혼관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사는 노아를 발견하시고 그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 역시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홍수 심판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구속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는데 그것은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키우고 그로 하나님을 섬기는 큰 민족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세상은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여러 민족과 언어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 아브라함을 통한 구속역사를 계획하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게 되고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구속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구속역사의 시작에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배우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람의 가정배경(11:27-32)

 

11: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열국의 아버지로 삼고자 그의 이름을 ‘한 가정의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11:27-32절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입니다. 여기에 아브람의 가정 배경이 잘 나와 있습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 그리고 하란의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막내아들 하란은 롯을 낳았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조카가 됩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을 했고 나홀은 밀가와 결혼했는데, 밀가는 하란의 딸이었습니다. 나홀은 자기의 조카딸과 결혼한 셈입니다. 또한 하란은 이스가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종합해 보면 하란은 그의 자녀로 롯과 이스가와 밀가를 두었습니다. 저자는 아브람이 자식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사래와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중간에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데라는 나이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12:1)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이 하란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4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75세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어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5:7에서 하나님은 친히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 15:7)고 하셨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하였습니다(느 9:7). 스데반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 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셨다”(행 7:2~3) 설교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곳은 하란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였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은 갈대아 우르임이 분명하고, 하란에 있을 때 다시 떠나라는 명령을 하신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아브라함이 데라를 따른 것이 아니라 데라가 아브라함을 따른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날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수아의 말대로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수 24:2).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것에 순종하여 그는 하란으로 옮겨갔습니다. 이곳에서 아브람은 데라가 죽기까지 머물렀습니다. 아무튼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에 머물며 지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부르심을 상기시키며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은 우상을 숭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만 해도 3천 종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머물러 있는 하란만 해도 갈대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시는 가나안 땅도 역시 다신교의 온상인데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곳에 가도록 하신 것은 논리상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실 것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지키는 백성이 거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만민 구속 역사를 섬길 나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원대한 구속역사의 관점으로 보시고 아브람이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가는 것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죄악된 환경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아브람의 고향 친척 아비집은 우상숭배의 본거지입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아버지 데라처럼 우상숭배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우상숭배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고향 친척 아비집에 머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새로운 일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악한 영향을 주는 데에서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 삶을 살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그녀에게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들은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 하나님의 은혜로 불타는 성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성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려면 거듭나기 이전의 삶의 성향과 구습을 끊어야 합니다. 결코 과거의 죄악된 삶에 대해 연연해하거나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익숙함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당시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말씀에 순종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거기 거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란 땅에서 익숙해졌습니다. 또다시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안일한 삶 속에서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이 있었고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굳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지 구체적인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니 행선지는 몰라도 출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믿음의 여정을 가기 위해서는 ‘익숙함’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안정감’을 누리려고 하는 마음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왔다가 떠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 것처럼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익숙한 것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없고 아무 사고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 둥지에서 흩으시고 창공을 나는 독수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원대한 비전을 갖고 부르신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그를 통해 크신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떠나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체적인 목적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그곳은 성경에서 묘사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아브람은 현재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의 계획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니 순종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라고 하는 그 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미지의 땅에 대한 정보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떠나는 데에는 그에게 다른 절실한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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