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을 베풀었습니다. 당시 문화권에서는 대개 3살경에 젖을 떼었다고 합니다(삼상 1:22-24). 그리고 젖을 떼면 이웃과 함께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본 것입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가 얼마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였고 100세에 이삭을 얻었으니 그때가 이스마엘의 나이 14살입니다. 그리고 젖을 떼기까지 3년이 걸리니 이때가 이스마엘이 17세가량 되었을 것입니다(16:16). '놀리다'는 말에는 '핍박하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놀린 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고의적인 핍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스마엘은 적자 이삭의 탄생으로 상속권을 박탈당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하갈도 가세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사라는 당장 아브라함에게 찾아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기를 구하였습니다. 사라와 달리 아브라함은 매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스마엘은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식이었으니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기 전까지 14년간 애지중지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어떻게 내쫓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공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이른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성경은 이 사건을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은 이삭을 약속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 하갈을 통해 난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이 불가능한 가운데에서 약속으로 주신 자식입니다. 육신의 자녀는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의해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9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가운데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짝하여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합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면서 양다리 걸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살고 싶고 이스마엘과 함께 살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 하십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육신의 자녀를 내보내라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인정에 얽매이는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 하여 좋게 좋게 이것도 용납하고 저것도 용납하고 조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삶을 살게 되면 육신의 자녀가 더 강하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다칩니다. 세상의 정욕과 죄가 거룩한 영적 소원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절은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공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권면합니다(갈5:16).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에게 주면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도 딸려 보내고 많은 재물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떡과 물 한 가죽부대라니요. 사실 비상 식량만 준 것입니다. 가장 보호가 필요할 때 왜 이렇게 보냈을까요? 아브라함은 매정하게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오랜 숙고 끝에 내린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앞날을 보장해 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도 재산을 물려줍니다(창 25:6). 내쫓김 당한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마침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목말라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하갈은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를 관목덤불에 두고 활의 사정거리만큼 떨어진 곳으로 가다가 두고 온 아이를 뒤돌아 보고는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갈이 눈을 들어 보니 샘물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갈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도움을 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장성하여 광야에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결혼시켰습니다. 결국 서로 떨어져서 사는 것이 이삭에게도 이스마엘에게도 유익이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과 함께 아브라함을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서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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