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정보를 여러 성경주석을 종합하여 알기 쉽게 풀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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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30장

독자를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창세기 22:7-12)

Barnabas Suh 2023. 6. 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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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sacrifice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을 믿은 아브라함(7-8)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버지와 아들이 모리아 산으로 가던 중 아들이 뭔가 낌새를 차렸는지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아브라함은 물론 ‘이건 인간적으로 못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이 과연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이삭을 대신할 어린 양을 준비하였다고 미리 귀띔해서 말했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한 것에 이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말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자기 아들 이삭을 살리실 수 있다는 부활의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말에서 우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독생자를 주실 수 있는 데에는 다시 살리실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7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것은 다시 살아날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아브라함도 부활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어린 양 예수님을 준비하셨습니다(요 1:29). 아브라함은 이를 잘 알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적인 의미로 믿음의 말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신 하나님(9-12)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올라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다음 순서로 이제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이삭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가 저항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삭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잡는다’는 말은 그냥 ‘죽인다(kill)’는 말이 아니라 ‘도축한다(slaughter)’는 말입니다. 즉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쪼개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칼을 잡았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는 척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때 하나님이 다급해지셨습니다. 칼로 찌르려는 순간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경외하는 믿음에 감동을 받아 말씀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너무 기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요 만물의 주관자요 주권자가 되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맹목적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맹목적인 것은 믿는 대상에 대한 지식과 성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확신에 기초해서 믿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죠.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때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고 믿고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는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잘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그물만 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임을 발견했을 때 두렵고 떨었습니다. 그에게 경외심이 생긴 것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금신상 숭배를 강요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 앞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능히 풀무불에서 건져내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모든 사람이 벌벌 떠는 바벨론 왕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모하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얘기죠.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모순되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라는, 자신도 잘 모르는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모순되는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세상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이런 모순되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삭과 같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하나님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냐? 이삭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놓일 수 있습니다. 경외하는 믿음이란 나의 ‘이삭’을 드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삭을 도로 주십니다. 예수님은 염려가 많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을 덤으로 주십니다. 로마서 8:32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은 독생자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한 것들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삭은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모순되는 것을 놓고 고민하지 말고 아브라함과 같이 단순히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예수님을 질문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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