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구절 성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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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장

믿음의 사람을 찾아간 마리아(누가복음 1:39-40)

Barnabas Suh 2023. 5. 1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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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교제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이 때에”는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했을 때와 그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발표하고 떠난 후를 말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기적적으로 잉태한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가 수태고지를 받고 바로 갔는지, 그녀가 임신한 상태가 어느 정도 지난 후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그녀는 엘리사벳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빨리” 갔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엘리사벳이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마리아가 임신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42). “빨리”라는 말은 ‘지체하지 않고 급하게’라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유대로 갔습니다. 마리아에게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의 잉태한 모습을 보고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확신을 얻기 위해 신앙 선배이자 영적인 멘토인 엘리사벳을 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녀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천사의 정보 제공도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집은 산골에 있는 “유대의 한 동네”였습니다. 아마 그녀의 집은 예루살렘 근처의 산간 마을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갈릴리로부터 약 1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도보로 3-4일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요셉이 마리아와 동행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8-24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성령 잉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태어날 아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가 되심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망하던 메시아가 그의 아내를 통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깬 요셉은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습니다(마 1:24). 이를 통해 볼 때 요셉이 마리아를 찾아가 확인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엘리사벳에게 역사하셨는지 알아보는 것이 그녀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습니다. “문안하다”는 말은 ‘평안을 빌다, 안부를 묻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사를 할 때 “평안을 빕니다(샬롬)”라는 말로 시작해서 “평안이 함께하시기를”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을 때마다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이라고 인사했습니다(룻 2:4). 인사를 나눌 때는 전통적으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앞으로 끌어당기어 목을 껴안고 오른쪽, 왼쪽 빰에 번갈아 가면서 서로의 빰에 입을 맞추며 인사의 말을 나누었습니다(창 27:26, 삼상 10:1, 20:41). 이 때는 엘리사벳이 임신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36).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천사의 메시지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자기에게 벌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잉태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로 평범한 처녀인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을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엘리사벳을 통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그녀의 신앙 선배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증거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친구나 선배, 영적 멘토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만남으로 서로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신자의 영적인 교제는 탁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신앙생활은 좁은 길로 가는 삶입니다. 그 길은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험준한 길입니다. 이 길을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버겁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믿음의 동역자를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자기만 혼자 남았다고 불평했습니다(왕상 19:10).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에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8).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데 혼자서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히 12:1). 우리는 항상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를 탁월한 은혜의 수단으로 여겨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도의 교제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인터넷 중계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은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교제를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제공하신 은혜의 수단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 좁을 길을 갈 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을 하는 영적인 친구와 믿음의 동역자들와 교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인간적인 사람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영적인 조언 대신에 인간적인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조언은 늘 들어왔던 똑같은 내용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쉬운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영적인 멘토나 믿음의 동역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위로는 아무 유익이 없는 동정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문제에 도전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을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동역자는 내가 조언을 구할 때 엘리사벳처럼 긍정적인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축복의 말을 해줌으로 믿음에 견고하게 서도록 해줍니다. 잠언 27:17은 이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잠언을 제시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믿음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은 친구의 얼굴을 환하게 빛나게 합니다. 낙심이 되고 슬픈 마음이 있다가도 믿음 안에서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때 어느새 부정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기쁨이 생겨 환하게 웃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두신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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